안녕하세요. 코드 서핑입니다.
이번 꼬꼬무에서 '코드명 kt' 즉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방영했는데요. 이번에도 역시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오늘은 kt 납치사건의 전말부터 풀려나기까지, 후에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갈등의 시작, 대통령 선거
김대중은 박정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둘의 갈등의 시작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971년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94만 표 차이로 선거에서 지게 되고, 크고 작은 사건을 겪습니다.
1 .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장난감 권총 화약에 배터리를 연결한 사제 폭발물이 폭발.
→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의 장난으로 처음에 밝혀졌으나 나중에 경찰의 위협으로 허위 자백했다고 함.
2 . 김대중이 탄 국회의원 선거 유세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
→ 사고로 골반 관절을 다쳐 후유증이 생김. 치료를 위해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함. 후에 이 사건을 정권의 암살 음모라고 지목했음.
두 사건은 대통령 선거 전 후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함으로써 김대중과는 완벽한 대립의 길을 가게 됩니다. 김대중은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망명하고, 워싱턴에서 '한국 민주회복 통일 촉진 국민 회의' 즉 '한민통'을 조직하고 반정부 투쟁을 시작합니다. 때문에,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코드명 KT' 납치사건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은 미국에서 조직한 '한민통'과 같이 일본 지부를 만들기 위해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2호에 투숙했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회담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김대중을 한 무리의 괴한들이 덮쳤습니다. 괴한들은 비어있던 2210호에 김대중을 감금했고 마취약을 투여했습니다.
뒤늦게 출동한 일본 경찰들이 본 장면은 텅 빈 객실과 대형 배낭 2개와, 13m 로프, 마취제로 쓰인 약병들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KT는 납치되었습니다.
KT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위였습니다. 괴한들은 처음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김대중을 옮기면서 옷을 갈이 입히고, 테이프로 입과 눈을 가렸습니다. 어디론가 향하는지 모를 공포 속에서 김대중은 모터보트를 타고 용금호 위로 인계되었습니다. 그의 손과 발에는 무게추로 바위를 달았고, 등에 판자를 대어 고정시켰습니다.
괴한들은 김대중을 수장시킬 생각으로 '바다에 상어가 많다'는 둥, '솜이불을 씌워서 던져버리면 괜찮다' 등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다로 수장될 줄 알았던 김대중은 극적으로 살아나게 되는데요. 항해하던 용금호 위로 비행기가 나타났습니다. 정체모를 비행기와 용금호는 추격과 달아나기를 반복하다, 마지막에는 김대중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김대중, 즉 KT는 1973년 8월 13일 납치된 지 129시간 만에 본인의 동교동 자택 앞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납치까지 해서 죽이려던 괴한들이 어떤 이유로 김대중을 풀어주었을까요?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 CIA의 개입으로 일본 해상 보안청 소속 비행기가 출동했다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KT 납치사건의 주도자 - 흑색 공작단, 윤 대령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들의 정체는 흑색 공작단이라 불리는 공작 단원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장이었던 인물은 '윤 대령'이었는데요. 윤 대령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한국의 007로 불렸던 사람으로 북파 공작원 출신의 현역 육군 대령입니다. HID 육군 첩보부대 출신이기도 한 그는 '실미도'부대를 창설, 지휘했던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후에 1급 흑색공작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윤 대령은 이제는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했는데요. KT 납치사건은 자신의 부대장이었던 하늘 같은 선배의 사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지만 자신이 독박 쓸 것을 우려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타지 않는 등 마무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 부장 이후락
앞서 갑자기 풀려난 이유에서 미국 CIA의 개입에 대해 말했었는데요.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하비브'는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그레그'에게 김대중이 납치된 후 24시간 동안은 박정희가 미국의 눈치를 볼 테니, 24시간 안에 김대중의 소재를 파악하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이에 결국 김대중을 찾아냈고, 박정희에게 찾아간 CIA 요원이 납치사건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자 앞에서는 '아이 돈 노'라고 말하고 뒤에서 '김대중을 풀어주라'라고 했다는 루머가 있다네요.
납치사건 당시, 진실규명위원회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졌지만 내사종결로 마무리되었고 관련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이후락은 사건 후 기자회견에서 국가의 개입은 부인했는데, 중앙정보부가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는 인정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요?
이에, 당사자인 김대중은 납치사건 직후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의 정치 보복은 없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자신에게서 끝나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꼬꼬무를 보면서도 당시 유신 정권의 부패함을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여기까지 KT 납치사건부터 풀려나기까지, 그리고 후에 어떻게 상황이 진행됐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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